편집장 에세이 - “엄마, 게임은 e-스포츠에요. TV로 축구 보는 것과 뭐가 달라요?”
‘Z세대와 살아가기’

발행 2020년 01월 21일

박선희기자 , sunh@apparelnews.co.kr

 

박선희 편집국장
박선희 편집국장

 

[어패럴뉴스 박선희 기자] 나의 아들은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이라는 신박한(?) 물건을 세상에 내 놓았던 2007년, 딱 그해에 태어났다. ‘토종’ Z세대다.


당시 나는 문학적 감수성과 인문학적 소양이 가득한 남자로 아들을 키워내겠다는 호기로운 꿈을 꾸었더랬다. 고된 기자 생활에도,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매일 저녁 책 읽어주기를 멈추지 않았고, 일주일에 몇 권씩 아이 책을 사들였다.


아이와 동반해 외식을 하거나, 모임 자리에 있을 때면 조금의 우려와 죄책감 속에 핸드폰을 쥐어준 적이 있지만,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책 읽어주는 소리에 까르륵 까르륵 토해내던 웃음소리와 호기심으로 빛나던 눈동자를 보며 의도(?)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믿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브릿지 세대의 ‘공포’

 

세 살 무렵이었을까. 주말 오후 거실에서였다.


아이가 TV 앞으로 다가가더니 화면에 손가락을 대고는 ‘터치 스크린’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아, 화면으로 만들어진 것은 다 스마트폰과 같다고 생각하는구나.’ 그 모습이 신기하고 귀엽다고 여겨진 것은 잠깐이었다. 이것은 전쟁의 서막이었다.


핸드폰을 쟁취하고자 하는 아이와 이를 방어하고자 하는 나 사이의 전쟁.


나는 70년대에 태어나 10대 후반 삐삐 시대를 거쳐, 스무 살이 되어서야 핸드폰을 접한 X세대다.


어린 시절에는 빨간 머리 앤, 백설공주, 신데렐라같은 책을 읽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한국 근대 문학과 세계 문학 전집을 읽으며 자랐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가 책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읽은 책들은 지적 허영심(?)의 발로가 되었고, 그 허영심이 만들어준 습관 덕분에 사회에 나와서는 매일 아침 신문을 읽고, 주말이면 책을 사들였다. 그 자양분이 쌓여 나는 지금도 밥벌이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두 시대를 통과한 브릿지 세대지만 종이의 냄새와 질감, 책장을 넘길 때의 소리가 좋다. 회사 SNS 채널을 관리하고,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정보와 트렌드를 확인하지만 개인적인 계정은 없다. 랜선을 통해 100명이 전하는 인사보다 눈을 마주보고 전하는 한 번의 인사가 소중하다. 굳이 구분하자면 나는 아날로그에 가까운 인간형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나에게 아이의 독서는 절대적인 과업이었고, 핸드폰은 최대 방해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 매스컴에서는 스마트폰의 온갖 부작용, 특히 교육적 부작용이 연일 보도되었다. 스마트폰 중독에 의한 청소년 범죄, 사회부적응, 그 안에 넘쳐나는 온갖 해악적 콘텐츠에 대한 우려로 가득했다.


세상에 보고 배우고 느낄 것이 이토록 많은데, 아이의 눈이 핸드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걱정되다 못해 ‘공포’가 되어, 아이가 자라는 내내 나는 전전긍긍했다.


기술은 퇴보하지 않는다, 새 질서가 필요할뿐

 

그러한 우려가 브릿지 세대가 겪는 부작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성찰해보자면, 인류는 정치, 경제적으로 퇴보한 적은 있지만 기술적으로 퇴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대의 교차 지점에서 인간들은 본래의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성, 일종의 관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온갖 부작용에 대한 걱정들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모든 변화 혹은 혁신은 부작용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법과 제도들이 만들어지며 합의점을 찾아간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 확인되어 왔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질서를 정립해 가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일정 수준의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자정 능력이 있다. 그래서 혁신이 일어나고 시대가 변화할 때는 부작용들에 집중하기보다 혁신의 순기능을 잘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기술은 기술일뿐,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고, 현명하게 삶에 적용하는 일은 쓰는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이전 시대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공부를 해야 한다.


날 때부터 스마트폰이 사람의 한 몸과 같이 여겨지는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 그것을 멀리하라 하는 것이 온당한 조치인가. 마차를 타다 자동차가 출현했는데, 자동차는 위험하니 계속 마차를 타라한다고 해도 결국 세상은 자동차의 차지가 된다. 그런데 회사 업무에서는 세상의 변화에 비교적 유연하면서도 사적인 영역에서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게 될 때가 있다.


전쟁 같은 날들이 흘러 지금 내 아이는 질풍노도의 14세가 되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가 나를 가르친다. 게임 중계 영상을 열혈시청 중인 아이에게 눈을 흘기면 아이는 말한다.


“엄마, 게임은 e-스포츠에요, TV로 축구 보는 것과 뭐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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